1700년대 유럽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공업에 뛰어든 일부 자본가들은 이익을 증식시키며 산업화의 수혜를 입었고, 귀족들 역시 그들에게 세금을 거두거나 자신들이 보유한 토지에 대한 지대를 거둠으로써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이에 반해 대중들은 처참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단의 학자들이 ‘우리가 가진 것은 부족하다(재화는 한정적이다). 이 부족한 것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효율적으로 늘려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처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민들과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일부 계층의 부의 편차는 기본적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배하지 못해서 발생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출발이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라는 두 저작을 통해, ‘가격’혹은 ‘시장’의 원리를 주장했고, ‘보이지 않는 손(가격)’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그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욕망, 혹은 이기심이었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고, 그 욕망은 당연한 것이며, 욕망에 의해 부여된 동기가 생산과 획득에 대한 열망을 불러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효율적인 교환과 분배 역시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에 수요·공급의 균형으로 형성된 가격은 가능하면 개입하지 말고 시장원리에 맞게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후 그는 고전주의 경제학의 아버지, 나아가서는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특히 현대 주류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적 사상에서도 그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개입하지 않는 시장)’에 대한 주장은 교범으로 불리며 떠받들어졌다. 현대 자본주의, 혹은 미국식 시장 자본주의의 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 현대경제학에 대한 반성과 전환
그런데 이 책 『경제학을 리콜하라』는 바로 이러한 전제부터 브레이크를 걸고 나온다.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저자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심심파적으로 쓴 책’으로 『도덕감정론』을 통해 다룬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 이기심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설령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의미 있는 저작이라 치더라도, 그 책에는 자유방임적 시장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자유주의적 불균형을 옹호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책의 논지가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번에 이 코너를 통해 다룬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동아시아라는 책에서도 심층적으로 다루어진 주제다. 또한 『자본론』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우파가 『자본론』을 들어 좌파를 공격하듯, 『국부론』 역시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현대 경제학자들이 단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의제만을 들고 마치 애덤 스미스가 오늘날의 현대경제학이나 시장을 전면적으로 옹호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 바 있다.
이 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단순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논제로 시장 원리의 모순에 대해서만 다룰 뿐 아니라 경제학이라는 학문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런 논지는 이 책의 저자인 이정전 교수의 명성과 맞물려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무게감을 획득하고 있다.
저자인 이정전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객원교수를 거쳐 한국자원경제학회장, 한국환경경제학회 이사, 서울시 도시계획위원, 경실련환경개발센터 대표, 환경정의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으로 재직한 정통 경제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로학자는 자신이 일생 동안 매달려온 경제학 그 자체에 대한 반성과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공감가지 않는 경제학 논리들
저자는 이 책의 초반부에 경제학자가 알려주지 않는 경제학에 숨겨진 진실을 먼저 파헤치고 있는데, 출판사의 설명을 빌려 살펴보면 책의 초반부는 다음과 같다.
경제학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를 하나만 콕 집어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손익 계산’이나 ‘수지 타산’일 것이다. 경제학이 전제하는 인간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꼼꼼히 비교한 다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 선택하는 존재다. 이런 인간관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처음과 끝을 관통한다. 손익 계산을 잘해야만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관과 가정을 바탕으로 경제학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뿐만 아니라,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까지 설명하려고 든다. 언뜻 보아 경제학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회적 현상들, 이를 테면 범죄·흡연·이혼·성매매 등에 관해서 경제학자들은 개인들의 손익 계산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행동의 결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범행에서 얻을 이익을 생각해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용을 따져 본 후, 그 득과 실을 비교해 본 다음 충분히 수지가 맞는다는 결론에 이르면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빈곤이나 실업, 사채업, 인간의 장기 판매 등 경제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정서와 상당히 다른 설명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혹은 소득보다는 여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까닭에 노동을 적게 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일을 조금하면 소득도 낮을 수밖에 없지만, 자기가 좋아서 가난해지기로 작정한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실업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대해서도 경제학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또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종종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되는 몸·혈액·장기·유아 등에 대한 판매(이른바 ‘절망적 교환’)에 대해서도 경제학자들이나 이른바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금지하지 말고, 오히려 공식적으로 허용해 그 시장을 활성화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팔아 돈을 쥘 기회를 넓혀 주는 것이 이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 경제학의 기본 원리 다시 보기
이렇듯 일반인들의 정서에서 한참 벗어난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행태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든다. 실제로 100여 년 전부터 경제학은 고도로 수학화 돼왔고, 그 결과 오늘날의 경제학 교과서는 온통 그래프와 수학 방정식 그리고 통계 숫자들로 도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경제학계에는 수학을 이용하지 않은 논문은 아예 논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몇 년 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경제학회지에 연구 결과 논문을 수차례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만 당했다. 이후 그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해설을 줄이는 대신 수학 방정식을 잔뜩 채워 넣어서 보냈더니 무난히 심사를 통과해서 발표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즉 경제학은 어느새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있고, 경제학 안에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 이 책은 중·후반에 리카도·밀·헨리 죠지 등 고전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다시 설명하며, 이후 케인즈로 이어지는 경제학의 기본 명제를 다시 풀어낸다. 즉 경제학은 이미 현대경제의 문제를 예감했고, 경제학의 아버지들은 이미 이에 대해 충분히 경고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경제학이 이를 무시하고 자본에 아부하거나, 복무하면서 스스로를 왜곡시켰고, 그 결과 금융위기조차 예방은커녕 예측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고 저자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인 이정전 교수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경제학이 수식과 도표로 어지럽게 설명된 통계로서가 아니라 철학과 통찰을 회복하고, 자본이 아닌 사람의 편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이러한 혜안은 경기회복과 성장의 환호성에 가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참담한 상황을 맞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에 대한 한 원로학자의 고언인 『경제학을 리콜하라』는 우리시대의 불을 밝히는 명저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